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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에도 배려받은 구멍가게

바보를꿈꾸는바보 2011. 1. 11. 02:08

2011.01.10 중앙일보 P33

 

  서울 인구가 부쩍 늘어난 17세기 이후, 언제부터인가 종로 길 위헤 작은 상업용 가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건물을 "가가(假家)"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해서 "가게"가 됐다. "국중(國中)의 대로"였던 넓은 길이 가게들 때문에 비좁아졌다. 열 지어 선 사람이라는 뜻의 열립군(列立軍), 또는 남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는 뜻의 여릿군(餘利軍)으로 불린 호객꾼들과 물건 사러 온 사람들, 그냥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뒤얽혀 가뜩이나 좁아진 길을 가득 메웠다.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졸로 1가부터 종로 3가 답골공원 어귀까지를 운종가(雲從街)라 불렀는데,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거리라는 뜻이다.

  종로는 본래 임금의 행차 때 쓰려고 넓고 곧게 조성한 길이었다. 그 길을 침범해 건물을 짓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러나 왕조 정부는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하는 일을 굳이 막지 않았다. 왕의 행차가 있을 때면 자진해서 철거하는 조건으로 묵인해 주었고, 얼마 뒤에는 아예 헐었다 지었다 하는 비용조차 왕실에서 대 주었다. 왕의 행차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가게 철거와 개건에 드는 비용이 능행 경비의 태반을 점할 정도였다.

  개항 이후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비좁고 불결한 거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1895년 4월 16일, 한성부는 "도로를 범하여 가옥을 건출하는 일"을 일절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9월 29일에는 종로와 남대문로의 가게를 모두 철거하고 도로의 원 너비를 회복하며 길가 건물의 외양을 통일한다는 내용을 담은내부령 제9호가 공포됐다. 종로를 넓고 깨끗하게 정비, 근대 국가 수도의 중심 도로답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정부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길가의 가게를 모두 헐었다. 가게 주인 일부에게는 안 쓰게 된 남대문 안의 선혜청 창고를 내주었다. 이에 따라 1897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으로 남대문 시장이 문을 열었다....중략...-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 글을 읽다가 좋아서 옮겨 적어 보았다. 그 옛날에도 서민의 상권을 보호하려 했는데...

지금은 무었인가, 도시 미관의 이유로 불법 포장마차, 행상들은 철거되고, 대형마트의 값싼 제품보급이 서민의 상권을 위협하고...

과연, 지금의 모습이 이 글의 배경이 된 시대하고 과연 얼마나 나아진 걸까?...고민하게 만든다.